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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숙에서의 잊지 못할 나날에

원대한 포부

 

1926년 6월 어느날 숙장선생이 새로 온 학생을 데리고 교실에 들어섰다. 

새로 온 의숙생의 나이는 겨우 15살이였지만 그분의 준수한 모습과 영채도는 안광이 모든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였지만 그분이 바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명성이 높으시였던 김형직선생님의 자제분이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이날 오후 의숙생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뵈오려고 그이께서 계시는 김시우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의숙생들이 방안에 들어와 빙 둘러앉자 한 의숙생이 위대한 수령님께 어린 나이로 독립군생활은 어떻게 했고 화성의숙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되였는지 이야기해달라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가볍게 웃으시며 독립군에 들어가본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시려던 아버지의 생전의 뜻을 언제나 잊지 않고 왜놈들에게 빼앗긴 조국을 찾는 일에 한몸바쳐 나서려고 화성의숙에 오게 된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방금전까지만 하여도 어린 독립군으로만 생각하였던 의숙생들은 비범한 체취가 느껴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열정넘친 모습과 그이의 높은 뜻에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참으로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신 우리 수령님이시기에 10대의 그 시절에 벌써 혁명의 먼 앞날을 내다보시고 타도제국주의동맹과 같은 그렇듯 혁명적인 조직을 결성하실수 있었던것이다.

 

동지를 얻기 위한 첫걸음

 

언제인가 한 의숙생이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축구경기를 하다가 다리를 상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완치시키기 위해 매일밤 그와 침식을 같이하시며 간호해주시였고 그의 학습도 방조해주시였다.

그 과정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와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피심에 의하여 얼마후 다시금 대지를 마음껏 밟고 뛰여다닐수 있게 된 그는 수령님의 두손을 꼭 잡고 아직까지 부모들한테서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받아보았다고 목메여 말하였다.

그러는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빨리 완치되여 정말 기쁘다고 하시며 혁명의 길에서 뜻을 같이하고 서로 돕고 이끌면서 생사를 같이하는 사람, 투쟁의 길에서 영원히 변치 않고 함께 나가는 사람이 동지가 아니겠는가고, 우리 서로 조선독립의 큰 위업에 뜻을 같이하고 서로 돕고 이끌면서 그 길에서 영원히 변치 않을 동지로 함께 나아가자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때 일을 두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본가들은 돈을 모으는 재미가 별재미라고 하지만 자신에게는 동지를 모으는 재미가 최상의 락이고 재미였다고, 동지를 얻기 위한 자신의 투쟁은 이렇게 화성의숙에서부터 첫발자국을 떼였다고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본사기자 김 련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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