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화성지구 2단계 1만세대 살림집준공을 기념하는 공연에서는 한편의 새로 나온 노래가 울려퍼졌다.
노래 《친근한
어버이》였다.
밝고 환희로운 이 노래는 행복의 대명사,기쁨의 대명사로 인민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4월의 《새집들이계절》과 더불어 또다시 펼쳐진 새집들이의 기쁨을 맛보는 만장을 한껏 격앙시켰다.
마치도 이전부터 퍽 귀에 익은 가사인듯,선률인듯 관중은 가수와 함께 열렬히 호창하며 음악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노래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일터마다,가정마다,거리마다 사람들이 있는 어디서나 이 노래가 울려퍼졌다.
날이갈수록 더욱더 비상한 감화력을 나타내는 이 노래를 창작한 작가가 바로 당시 평양학생소년궁전에서 작가로 사업하던 안분희였다.
나이는 44살.
머리 희슥한 로작가들에 비하면 그렇듯 훌륭한 명가사를 내놓은 그의 인생행로가 너무도 짧아보였다.
그 행로에 찍혀진 경력을 보아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바 없었다.
좀 남다른데가 있다면 어릴적의 안분희에게는 《문학신동》이라는 별칭이 붙어있은것이다.
소학교시절에 분희는 공부를 잘하여 늘 앞자리를 차지하군 하였다고 한다.
그로 해서 동무들속에서는 언제나 본보기가 되였고 선생님들속에서는 칭찬이 뒤따랐다.
특히 분희는 글짓기를 무척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어느 영화를 보고 쓴 장문의 감상글이 학교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선생님들은 서로 돌려가며 동심의 글이지만 어른스러운 마음이 들어있는 분희의 작품을 깊은 감동속에 보고 또 보았고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동네방네 딸의 작품을 들고다니며 자랑했다.
그런 연고로 소학교를 졸업할 때 분희에 대한 담임선생의 평정은 다음과 같았다.
《안분희학생에게는 확실히 앞으로 훌륭한 작가로 될수 있는 문학적재능이 있음.》
그것을 증명하듯 안분희는 중학교시절에도 련이어 수필 《붉은기》,동시《내가 찾은 기발》을 창작하여 전국적인 경연에서 1등을 하였다.
마치 수채화로 채색한것처럼 유순하고 지줄대며 흐르는 시내물처럼 고르로우면서도 발견이 독특하고 심오하다는것이 안분희의 작품에 대한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이였다.
어제날의 《문학신동》은 사회에 나와 로동생활을 하는 과정에도 군중문학작품을 련이어 창작하여 두각을 나타내였고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을 거쳐 마침내 작가대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어릴적에는 자기도 모르게 소중한 부름으로 마음속에 간직된 작가,그 꿈이 현실로 꽃펴난 긍지와 기쁨을 안고 안분희는 창작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작가다운 눈으로 보는 모든 현실은 이전에는 느껴볼수 없었던 새로운 감정과 환희를 낳았다.
그러던 어느해 5.1절이였다.
그날 안분희는 중학교동창들과 함께 명절을 즐기는 기회를 가지였다.
오래간만에 이루어진 상봉이여서 나누는 정도 류달랐다.
그 정에 깔린 생활경위들도 서로에게는 무척 관심사로 되였다.
누구는 송화거리에 일떠선 새집을 받아안은 자랑을 했고 또 누구는 자기 세대주가 바로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타보셨던 궤도전차운전사라고 긍지에 넘쳐 말하였다.
또 어느 공장에서 로동자로 일하는 누구는 자식들이 국가에서 베푸는 무료교육의 시책으로 마음껏 배우고 희망대로 상급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고 눈물이 글썽하여 말하였다.
안분희는 그때 그들의 진정어린 이야기들에서 우리 당에 대한 열렬한
흠모,경애하는 총비서동지에 대한 맑고 순결한 인민의 신뢰심을 느꼈다.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고 나라에서 아이들에게 교복과 학용품을 일식으로 안겨주며 내세워주는 사랑의 이야기들이 태여나는 근로인민의 세월,
온 세계가 몹쓸 전염병의 란무장이 되여 신음할 때에도 이 땅의 이름없는 산골막바지에까지 아이들을 위한 젖제품이 매일같이 공급되고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보내주신 사랑의 불사약이 이 땅의 천만자식들에게 가닿았으며 횡포한 자연의 광란이 아무리 휩쓸어도 피해지역 인민들에게 더 멋진 새집들을 안겨주는
위대한 김정은시대에 우리가 살고있다.
이 땅에 태를 묻은 사람이라면 누구라없이 어머니당의 은정속에 성장의 자양분을 받아안으며 인생길을 걷고있다.
그들 모두의 인생길과 나란히 놓인 자신의 삶도 새삼스럽게 돌이켜졌다.
어제날 문학소녀의 재능의 싹을 틔워주고 성장의 걸음걸음 헛디딜세라 다정히 이끌어준 선생님들,문학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마음써온 대학선생님들,인생의 자서전에 지울수 없이 새겨진 그 모든 고마운분들의 모습에서 분희는 우리 당의 참모습,고마운 사회주의제도의 영상을 보았다.
정녕 지나온 자신의 인생길,아니 전체 인민의 인생길은 하나같이
위대한 당의
손길아래,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크나큰 은정속에 세상에 부럼없이 걸어온 행복넘친 길이였다.
안분희의 마음속에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위인상을 소리높이 구가하는 가사를 창작하려는 불같은 열정,강렬한 창작적열망이 솟구쳤다.
그것은 단순히 작가로서의 사명감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가장 위대하고 친근하신
어버이에 대한 흠모와 매혹을 끝없이 터치고싶어하는 이 나라의 한 공민의 권리에서 출발한것이였다.
가사창작과정에 안분희는 하나하나의 시구마다에 자신의 지나온 생활체험과 축적된 감정,나아가서 전 인민적인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그야말로 자그마한 꾸밈도,가식도 없는 우리 인민의 솔직하고 진실한 심정을 담기 위해 노력하였다.
노래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어른이건,아이건 누구라 할것없이 어디서나 열창하고있는것은 바로 이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저 인민들이 자기 생활가까이에서 받아안고 겪어오며 늘 입에 올리던 말들을 온 세상에 터쳤을뿐입니다.
이 노래야말로 나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전부터 전체 인민이 마음속으로 저도모르게 부르고부른
위인칭송의 송가입니다.》
노래가 나온 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인사를 보내올 때면 안분희는 이렇게 말하군 한다.
지금 안분희는 새로운 일터에서 창작의 나래를 펼치고있다.
무릇 시는 시대의 언어라고 한다.
날마다 더욱 환희롭게 변하는 시대,더욱 광명할 미래가 기약되여있는 오늘의 우리 시대를 감득할수록 안분희는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깊이 새겨안는다.
이 시대를 다 노래하기에는 필력이 부족한것만 같은 안타까움에 모대길 때도 있다.
그러한 그에게 인민은 고무와 격려를 보낸다.
앞으로도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이 좋아하는 작품을 더 많이 창작해줄것을 기대하고있다.
글 본사기자 엄 영 철
사진 본사기자 정 성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