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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고구려나무다리유적

대동강고구려나무다리유적은 5세기초엽 고구려의 왕궁인 안학궁앞쪽 대동강에 있던 다리터로서 오늘의 평양시 대성구역 청호동과 사동구역 휴암동사이를 이어주던 커다란 나무다리유적이다.

다리는 총길이가 375m, 너비가 9m나 되는 대단히 큰것이였을것으로 인정된다.

다리유적으로는 청호동쪽의 대동강기슭에 굵은 나무기둥 2대가 강바닥에 박혀있었고 큰 각재들이 강바닥에 동서 또는 남북으로 가로세로 드문드문 놓여있었으며 강건너편인 휴암동쪽의 대동강기슭에도 같은 굵은 각재들이 제방뚝밑에 박힌채 옆으로 삐죽이 나와있었다.

강의 량쪽 대안을 련결하는 일직선상의 강복판에도 다리골조 3대가 동서로 가로놓여있었다.

강우에 가로질러놓았던 다리의 본체는 다 없어지고 휴암동쪽의 강기슭에 파묻힌 다리골조들만이 남았다.

발굴해본데 의하면 나무다리의 기초골조는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

발굴된 유적에 기초하여 다리의 구조와 형식을 복원하여보면 다리의 입구부분은 나무를 부채살모양으로 깔았고 본체부분은 널판을 가로세로 깔았으며 량옆에는 란간을 세웠다는것을 알수 있다.

다리의 기둥은 물이 닿지 않는 입구부분에는 큰 각재우에 튼튼한 모기둥을 세웠었고 물이 흐르는 본체부분에는 사개물림방법으로 귀틀을 짜고 그안에 돌을 가득 채웠었다.

슬기로운 고구려사람들은 당시로서 대단히 큰 다리를 놓으면서도 못이나 꺾쇠 같은 쇠붙이를 하나도 쓰지 않고 크고작은 모든 이음새들을 사개물림하는 방법으로 든든하게 고정시켰다.

그때 당시 고구려사람들은 물기와 늘 접촉하게 되는 나무구조물에서는 쇠붙이를 써서 련결시키는 방법보다 사개물림하는 방법이 더 우월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다리의 골조들사이와 골조우,등불대터부근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유물들이 나왔는데 나무쪼각이 박혀있는 주머니식손잡이에 나무를 박아서 쓰게 된 쇠끌 1개도 나왔다.

다리의 가로골조끝에 난 끌자리가 이 쇠끌의 날과 일치하는것으로 보아 다리를 놓을 때 쓴것으로 인정된다.

이 다리유적은 고구려사람들의 건축술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고있었는가 하는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 및 군사적위력의 일단을 엿볼수 있게 하는 귀중한 력사유적이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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