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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투소녀》의 어제와 오늘

평양시 대동강구역 사곡초급중학교 학생인 오평경은 전국의 학생들속에 《약봉투소녀》로 널리 알려져있다.

지난해 최대비상방역기간 오평경학생은 1만5천개의 약봉투와 수많은 위문편지를 군의아저씨들에게 보내는데 앞장선것으로 하여 조선소년단 제9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토론까지 하였다.

당시 그는 대동강구역 대동강소학교의 학생이였다.

얼마전 우리는 평경학생을 소개하기 위해 그의 가정을 찾았다.

집에 들어선 우리에게 평경이는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을 떼였다.

《악성비루스가 온 나라로 퍼져가던 때 아버지원수님께서는 우리 대동강구역의 약국들을 제일 먼저 찾으시였습니다.》

지난해 5월 어느날 대동강구역의 약국들을 찾으신 아버지원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약은 어떤 약들이며 가격은 얼마인가를 하나하나 알아보시였다.

그때 평경이는 고열로 쓰러져있었다고 한다.

집에는 약이 다 떨어졌고 39°까지 오른 열은 내리지 않았다.

깊은 밤 눈을 떠보니 누군가 그의 머리를 짚어주고있었는데 그때 평경이의 눈에는 적십자표식이 그려진 하얀 완장을 낀 군복이 제일 먼저 보였다고 한다.군의아저씨였다.

자기의 머리도 짚어주고 약도 먹여주면서 정성다해 보살펴주는 군의아저씨를 보는 순간 평경이는 꼭 자기의 아버지를 보는듯싶었다.

그처럼 살뜰하던 제대군관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이제 더는 볼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것만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켰던것이다.

그날부터 평경이는 병을 털고일어나 약봉투를 만들었다.

첫날에는 100개밖에 만들지 못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에는 250개를 더 만들었다.

밤늦게까지 약봉투를 만드느라 허리와 손목이 아파났지만 군의아저씨들을 위해 좋은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평경이는 약봉투와 함께 자기의 마음을 담은 편지와 함께 시원한 콩단물도 보내주었다.

그러나 군의아저씨들은 평경이가 그새 키보다 마음이 더 컸다고 칭찬하면서도 콩단물만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평경이는 그들의 모습을 더는 볼수 없었다.

사람들이 다 잠든 깊은 밤 인민군대 군의들은 너무도 조용히 떠나갔기때문이였다.

《지금도 보내지 못한 약봉투와 편지들을 보면 우리를 구원해준 고마운 군의아저씨들의 모습들이 떠오르고 고마운 군의아저씨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아버지원수님께로 마음달려갑니다.

고열속에 심히 앓으시면서도 우리들 생각에 한순간도 자리에 눕지 못하신 아버지원수님이 아니십니까.

진정 경애하는 아버지 김정은원수님은 우리들의 행복과 밝은 웃음을 꽃피워주신 자애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오늘도 평경이는 자기를 구원해준 고마운 인민군대아저씨들의 모습들을 그려보며 어머니인 김미경녀성과 함께 자기의 지성이 담긴 소박한 원호물자와 위문편지를 조국방선에 보내주고있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김 련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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